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1907년 평양 대부흥 (문단 편집) == 결과 == 본문은 <개혁신앙> 사이트를 참고하였다. [[http://www.thetruthlighthouse.org/%EC%83%88%EB%A1%AD%EA%B2%8C-%EC%9D%BD%EB%8A%94-%ED%95%9C%EA%B5%AD%EA%B5%90%ED%9A%8C%EC%82%AC28-1907%EB%85%84-%ED%8F%89%EC%96%91%EC%9D%98-%EB%8C%80%EB%B6%80%ED%9D%A5/|#]] 이 사건의 영향으로 조선 기독교가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고 신앙생활에 있어 성경 연구와 기도, 전도, 봉사, 봉헌의 생활이 강조되었다. 사경회가 열리는 곳마다 공적인 회개와 더불어 4월까지 계속되었다. [[1908년]]에는 이웃 국가인 [[청나라]]로 확산되었다. [[청나라]]에서 온 신학자 호만성(胡萬成), 장석정(張賜禎)이 1907년 입국하여 평양에 일주일간 체류하면서 부흥운동의 현장을 직접 관찰하고 돌아가 전했는데 그 결과 [[청나라]]에서도 평양에서 일어난 강력한 회개와 영적 각성운동이 일어났다. 당시에는 [[양성평등]]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는데 여성의 지위향상, 신분타파, 교육의 열기, 의식개혁, 세계관의 변혁, 민족의식, 미신타파, 조선인에 대한 선교사들의 시각 변화 등 부흥운동은 사회 전반에 놀라운 영향을 미쳤다. 그 결과 평양이 '동방의 예루살렘'이 되었다. [[1907년]] 이기풍 선교사가 [[전라남도]] [[제주특별자치도|제주목]] 선교사로 파송되었고 최초의 한국인 선교사가 되었으며 [[1913년]] [[대한예수교장로회|조선예수교장로회]] 소속 선교사 3명이 [[북양정부]] [[산둥성]]에 파송되며 최초의 해외선교사가 되었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